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샤를 용담공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1460년쯤 황금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한 젊은 시절의 용담공 샤를을 그렸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1460년쯤 황금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를 한 젊은 시절의 용담공 샤를을 그렸다
부르고뉴 공작
재위 1467년 6월 15일–1477년 1월 5일
대관식 1486년 4월 9일
전임 선량공 필리프
후임 부귀공 마리
신상정보
출생일 1433년 11월 10일
출생지 부르고뉴 디종
사망일 1477년 1월 5일 (43세)
사망지 로렌 낭시
가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부친 선량공 필리프
모친 이자벨 드 아비스
배우자 카트린 드 프랑스
이자벨 드 부르봉
요크의 마거릿
자녀 부귀공 마리

샤를 1세(프랑스어: Charles Ier, 1433년 11월 10일 ~ 1477년 1월 5일)은 부르고뉴의 공작으로, 실질적으로 부르고뉴를 통치한 마지막 공작(재위: 1467년 - 1477년)이다. 용담공(프랑스어: le Téméraire) 혹은 담대공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치세에 부르고뉴 공국은 가장 크게 번성하였으며 독립된 왕국으로 만들어 왕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였으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북부 알자스를 사들였고, 즈펜과 게일더스와 로레인을 정복하여 마침내 부르고뉴의 북부와 남부영지를 통합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몇몇 유럽 강대국들의 적개심을 야기시켰고 부르고뉴 전쟁을 촉발시켰다.

로레인 공작 레네 2세와 계약한 스위스 용병들과 벌어진 낸시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무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아들 샤를(훗날 샤를 8세)과 마리(용담공 샤를의 딸)를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한후 그와 혼인함으로 부르고뉴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1]

생애

초기 생애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 3세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샤롤레 백작으로 불렸고, 황태자의 친구로 프랑스식으로 양육되었다. 황태자는 나중에 프랑스 왕 루이 11세로 즉위했는데, 즉위하기 전에 부르고뉴에서 5년을 지냈다. 1457년 부르봉 왕가의 샤를 1세의 딸 이자벨(1465 죽음)과 결혼했다.

아버지가 병이 나서 자신이 부르고뉴를 통치하게 되기 전까지는 전혀 프랑스에 적대적이지 않았으나, 1467년 6월 15일 아버지가 죽고 부르고뉴 공작이 되자 프랑스에서 부르고뉴를 독립시키고 가능하다면 왕국으로까지 발전시키려는 야망을 가졌다.

공작 즉위

그는 1474년까지는 승승장구하여 뻗어나갔다. 샤를은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여 하나의 주(州)로 편성하고 그것을 프랑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부르고뉴는 루이 11세가 솜강 연안(지금의 로렌지방 일대) 부르고뉴 영토를 장악하는 바람에 영토가 둘로 나뉘어버리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샤를은 당연히 이 지역을 합병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또한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요청하여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에서 독립된 하나의 왕국으로 승인 받으려는 움직임도 취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히 루이 11세의 심기를 건드렸고, 루이 11세는 경제 봉쇄령과 같은 다양한 채녈을 가동하여 샤를을 막았다. 샤를은 샤를대로 루이 11세에 대항하는 프랑스 내 유력자들의 동맹인 공익 동맹의 주요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됨으로써 루이 11세에 대한 평생에 걸친 투쟁에 나섰다.

루이 11세는 1465년 10월에 체결된 콩플랑스 조약을 통해 그에게 솜강 연안의 영토를 돌려주었고 샹파뉴를 결혼 지참금으로 삼도록 해 자기 딸 안과 결혼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한편으로 루이 11세는 디낭과 리에주의 도시들을 계속 부추겨 부르고뉴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

그러나 샤를은 1466년 디낭을 약탈하고 아버지인 필리프가 1467년에 죽은 후 리에주 주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그들의 자유를 박탈했다. 더 나아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루이 11세를 눌렀다.

그는 1468년 7월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을 3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자 루이는 같은 해 10월 페론에서 그와 협상하려 했다. 페론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샤를은 리에주가 루이의 지원을 받아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샤를은 루이를 배신자로 여기면서도 협상을 계속하는 한편 루이로 하여금 플랑드르·강(헨트)·브뤼주를 파리 고등법원의 관할에서 제외하도록 했으며, 또한 리에주 반란 진압에 협력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리에주는 파괴되었으며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그러나 휴전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470년 ~ 1471년 루이는 샤를에게 파리 고등법원에 출두할 것을 명령하고 솜 지역의 몇몇 도시를 장악했다. 샤를은 1471년 ~ 1472년까지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를 침략함으로써 보복했으며 루앙까지 쳐들어가 프랑스를 유린했으나 보베 공격에는 실패했다.

1472년 11월 다시 휴전이 이루어졌으며 샤를은 새로운 공격을 하지 않고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을 계속 도와줄 것이라는 보장을 기다렸으며 자신의 영지 동쪽 변경문제의 해결을 지켜보기로 했다.

샤를은 자신의 영토를 라인 지역까지 확장하려 했으며 부르고뉴와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에 접한 변경지역의 땅을 손에 넣음으로써 자기 영토를 하나의 단위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1469년 알자스 변경백의 영지인 페레트 주(州)를 샀으며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대공으로부터 몇몇 도시들을 샀다.

1473년에는 헬더란트의 아르놀트 공작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확보했다. 이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스위스 지방과 쾰른을 정복하고 르네 2세(보드몽의 르네)로부터 로렌을 얻어내는 것만 남았을 뿐이었다.

행정개혁

이러한 가운데 샤를은 부르고뉴의 행정기구와 군대를 재편했다. 티옹빌에서 공표된 법률(1473)에 따라 기병대를 창설하고 훈련과 전술에 관한 규율을 제정했다. 또한 많은 우수한 총기를 갖추었으며 용병을 고용하고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장들을 자신의 부대에 끌어들였다.

정부를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네덜란드 지역 공작령의 재정을 관장하는 단일기구로 회계청(chambre des comptes)을, 자기 개인 영지의 행정을 감독하는 이재청(chambre du trésor)을, 세금 징수를 관장하는 총무청(chambre des généraux)을 설치했다. 그는 상설기구로 된 신분 의회에서 매우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사법을 관장하기 위하여 그는 대심의회(grand conseil)라는 법정을 말린에 두어 그곳에 파리 고등법원의 사법권을 능가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본과 돌에서 번갈아 열리는 또다른 법정을 두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하였고, 이제 왕의 칭호를 얻는 일만을 남겨두었다. 그는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잠시 품었지만 포기했다. 한편 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트루아에서 만나 자신이 부르고뉴 왕이 되는 데 동의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왕의 휘장이 준비되고 즉위식 일정도 잡혔으나 1473년 9월 갑자기 프리드리히는 밤중에 달아났는데, 아마도 야심에 찬 샤를을 미심쩍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 되려던 샤를의 꿈은 3년이 채 못 되어 무산되었다. 소도시 노이스쾰른 시민들로부터 빼앗으려던 그의 계획은 노이스에 대한 11개월(1474년 7월 ~ 1475년 6월)에 걸친 공세가 끝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포기해야만 했다.

더구나 에드워드 4세와 루이 11세 사이에 맺어진 피키니 조약(1475. 8. 29)으로 샤를의 동맹이었던 잉글랜드는 그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1세와 협정(1474. 8)을 맺은 로렌의 르네가 그를 공격하였고, 부르고뉴 전쟁이 발발해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라인 강 상류 도시들의 동맹에게도 공격을 받게 된 샤를은 1475년 11월 낭시를 점령했으나, 1476년 3월과 6월에 각각 그랑송 전투모라 전투에서 스위스군에 패배했으며 10월에는 낭시를 잃었다.

사망

낭시 전투

1476년 샤를은 로렌 공작 르네 2세의 군대로부터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를 탈환하기 위해 이곳을 포위했다. 한겨울이란 상황에도 불구하고, 샤를은 날씨가 만약 호전된다면 시기를 놓쳐 재빨리 르네가 구원군을 이끌고 올 것 임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공성전을 완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혼전 속에서 치루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사하였다.[2]

사후

샤를은 상속을 위한 적법한 아들이 없었고 그의 유일한 딸 마리만 남게 되었다. 샤를의 영지인 부르고뉴는 왕자령으로 상속자가 단절되었을 때 프랑스 왕실로 귀속되는 전통이 있었다.[3] 따라서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부르고뉴를 왕실에 귀속시키려했다. 또한 도팽 샤를과 마리(용담공 샤를의 딸)를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한후 1477년 8월에 그와 혼인하여 그녀의 상속지를 지키려했다.

막시밀리안 1세와 루이 11세간에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1479년 8월에 벌어진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키며 대부분의 부르고뉴 공국은 합스부르크가로 넘어가게 되었다.[1] 1482년 마리가 낙마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영토분쟁이 불거졌다. 막시밀리안 1세는 루이 11세와 1482년 12월 23일에 아라스 조약을 맺고 영토분쟁을 마무리 짖고 자신의 2살된 딸 마르가레테와 루이 11세의 장남 도팽과 약혼시켰다.

같이 보기

각주

  1.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124
  2.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123
  3.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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